Page 38 - Golf Champion - July 2020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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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LPGA TOUR]


          로님이 골프를 시켜볼 것을 권하셨다. 부모님 역시 내가 바깥에                   순천에서 티칭프로로서 좋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. 자격증을 따
          서 운동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. 내가 태어났을 때 아                  기 위해서는 70대 초반의 스코어를 내야 했기 때문에 열심히 운
          버지는 트럭을 운전하셨다.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네 살 때 교통                  동을 했다. 17살이 되었을 때 내가 알고 있던 서울의 유명한 감
          사고를 당하셨고,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장애를 입으셨다. 당시                   독님께서 학교와 골프를 병행할 수 있는 골프 아카데미의 기숙
          의 어린 나는 아버지가 결정한 선택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.                   사에 들어오겠냐고 제안하셨다.
          당시 아버지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수도, 인생을 포기하셨을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그것이 나의 첫번째 갈림길이었다. 나는 집에 머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물러 있어야 할 이유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. 아버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지의 존재는 내가 집에 머무를 수 있는 확실하고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완벽한 이유였다. 휠체어에 앉아 계신 아버지로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부터 멀리 떨어지기 싫었다. 사실, 나는 좀 무서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웠다. ‘내가 그곳에서 훈련할 만큼 충분한 실력일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까?’, ‘서울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까?’, ‘내가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향수병에 걸리지나 않을까?’ 등등 걱정이 많았다.

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두렵긴 했지만 움직이기로 결심했다. 그리고 그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것이 나의 전환점이었다.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다는 것, 순천에서 벗어나 부모님으로부터 떨어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져 새로운 친구들과 우정을 쌓고 공부와 훈련을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할 수 있을 만큼 단련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,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전 보다 골프 실력도 훨씬 좋아졌다.

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순천에서는  지역의  작은  주니어  대회와  아마추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어  대회에  출전했지만  한  번도  우승한  적이  없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었다.  아카데미에  있는  동안,  나는  최고의  아마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추어들이 출전한 전국 대회에서 우승했다. 그리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고 그 순간, 내가 좋은 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다
          수도 있었을 것이다. 하지만 아버지는 새로운 환경에 대해 배우                   는 것을 느꼈다.
          고 적응하며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셨다.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원래 계획이었다면 19살쯤, 모든 것이 편안하고 친숙한 우리 집
          그 결정은 아버지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, 그 모습은 내                  근처에서 티칭프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. 선택의 결과, 나
          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.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는 내가 6번째로 이정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KLPGA의 투어 선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수가 됐다. 거기서 내 이름 끝에 있는 숫자 6이 유래되었다. 난
          사춘기를 겪는 또래 친구들처럼, 12살이었던 나는 골프가 지루
          하다고 생각했다. 그 당시 나는 골프라는 운동을 사랑하지는 않
          았다. 떠밀려 배우는 기분이었다.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3년 동
          안 골프를 쉬었고, 부모님은 이해하셨다. 부모님은 내가 행복해
          지기를 원하셨다.


          나는 대부분 한국하면 떠올리게 되는 서울같은 대도시와는 거
          리가 먼 전라남도 순천에 살았다. 순천에서의 생활은 느리다. 모
          든 사람들이 서로를 안다. 그 지역을 떠나는 사람도 많지 않고,
          모든 이웃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.


          15살 때 다시 골프를 시작했는데, 이번에는 내가 원한 것이었고
          티칭프로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. 골프를 충분히 잘 하게 된다면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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